누구나 리서치 하는 시대, UX리서처의 생존법
“누구나 쉽게 유저를 만나고, AI가 인터뷰까지 대신해주는 시대에, UX리서처는 뭘 할 수 있을까?”
이미 해외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AI 모더레이터가 유저와 공감하며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대규모 글로벌 리서치를 자동으로 수행하는 도구들이 등장하고 있어요. 게다가 synthetic user(합성 유저) 같은 개념이 보편화되면서, 프롬프트 몇자만 적으면 실제 유저를 리크루팅 하지 않아도 정량조사, 심지어 그룹 인터뷰까지 진행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어요.
실제로 최근 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직 내에서 리서처가 아닌 디자이너·기획자·PM/PO들이 직접 리서치를 수행하는 회사의 비율이 약 84%에 달한다고 해요. 리서치는 더 이상 ‘특수한 역할’이 아닌 ‘모두가 쓰는 도구’가 된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변화 속에서 UX리서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제품 개발의 세 단계로 나눠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1. 아이디어 단계 - 퍼즐의 테두리부터 맞추기
여러분도 퍼즐을 맞춰보신 적 있으시죠? 큰 퍼즐일수록 막막하지만, 테두리 조각을 맞추면 전체 그림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해요.
제품 기획 초기 단계도 마찬가지예요. 기술도 있고 아이디어도 넘치지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죠. 이때 UX리서처는 "유저 관점"이라는 테두리 조각부터 맞추는 작업을 해요. 팀의 관점을 '우리가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에서 '우리는 유저의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죠.

보통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할 때 시장, 비즈니스 임팩트에 대한 생각부터 하게돼요. 이때 리서처는 사용자 관점으로 서비스의 뼈대를 잡는 역할을 해야해요.
- 그래서 유저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 유저는 어떤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되나?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해결할 유저의 문제와 제공할 핵심 가치를 먼저 명확히 정의하는 거죠.
사례: AI 실시간 시장 이벤트 해석 서비스
이 프레임워크로 제품 컨셉을 구체화했던 사례를 소개해볼게요. 바로 인공지능(AI)이 주가 변동의 이유를 직접 해석하고 요약해주는 시장 분석 서비스 ‘AI 시그널’이에요.

투자 시장은 방대한 뉴스, 공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쏟아지며 개인투자자가 의미있는 정보를 선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만약 AI가 실시간으로 주가 변동 및 시장 흐름을 분석해, 증시가 흔들릴 때마다 그 이유를 알기 쉽게 해석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정보 탐색과 해석에 소모하던 시간을 줄이고, 핵심만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획하는 시점에 세웠던 가설은 아래와 같아요.
- 이 서비스를 론칭하면 뉴스 소비와 재방문율이 높아질 것이다.
- 이걸 통해 종목 탐색을 더 자주 반복하게 될 것이다.
- 비즈니스 임팩트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빠져있지 않나요? 바로 사용자 관점이에요. 제품이 얼마만큼의 임팩트를 낼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에요. 하지만 성공 지표에 사용자 관점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서비스 자체가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재방문율을 높인다는 목표에만 집중하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콘텐츠를 노출하게 할 수도 있겠죠. 탐색을 더 자주 하게 만든다는 목적에만 집중하면, 사용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새로운 정보를 계속 보여주게 될 수도 있고요. 이런 UX는 오히려 불필요한 탐색을 하게 하고, 사용자는 나와 관련 없는 내용에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어요.
공급자 입장에서의 가치가 아니라 사용자의 문제와 가치에 집중하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제품팀과 함께 사용자 관점으로 문제를 정렬해봤죠.
사용자는 어떤 문제를 겪고 있을까?
우리 서비스에서 사용자는 어떤 가치를 느껴야 할까?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면, 우리 제품이 향해야 할 명확한 방향, 일종의 북극성이 생깁니다. 퍼즐의 테두리를 먼저 맞추면 전체 그림이 또렷하게 보이듯, 문제와 가치를 분리해 정리하는 과정은 제품의 윤곽을 분명하게 만들어줘요.
그리고 이렇게 정의된 문제와 가치는 이후 결정하는 모든 액션 아이템의 체크리스트가 됩니다. 우리가 만든 시안이 정말 사용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또 우리가 설정한 가치가 실제로 사용자에게 ‘가치’로 받아들여지는지. 사용자를 만날 때마다 이 두 가지를 계속 확인하는 거죠.

2. 개선 단계 - 흩어진 생각을 하나의 방향으로
사용자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제품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 때 리서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흩어져 있는 문제를 사용자 목표 중심으로 정리하고, 그에 맞는 개선 기준을 만들어야해요.
사례: 토스증권 증시 캘린더
증시 캘린더는 주식 시장에 영향을 미칠 만한 주요 경제 이벤트나 기업들의 일정을 달력 형태로 보여주는 기능이에요. 미국 금리 발표, 기업 실적 발표 등을 표시해주죠.

토스증권의 증시캘린더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한 기능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한 주의 이슈를 자동으로 정리해주는 AI 주간 요약, 복잡한 지표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지표 해석 기능이 대표적이죠.
토스증권의 캘린더도 처음에는 이런 기능 없이, 말 그대로 일정만 보여주는 단순한 형태였어요.
그런데 실제 투자자들을 관찰해보니 유튜브, 커뮤니티 등 여러 채널을 돌아다니며 주요 증시 일정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있더라고요. 사용자의 니즈가 확실하다고 생각했고, 캘린더가 단순 일정 표시를 넘어 투자 흐름을 정리해주는 도구가 된다면 훨씬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능 고도화를 위한 개선을 시작했죠.
그런데 막상 이 캘린더의 어떤 지점을 개선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눠보니, 팀원마다 바라보는 지점이 모두 달랐어요.
- "캘린더인데 캘린더처럼 안 생겼다."
- "정보 위계가 없다.”
- "이벤트 종류가 너무 많다.”
이 상태로는 무엇부터 해결해야 하는지가 모호한 상황이었죠. 캘린더처럼 보이도록 UI를 바꾸면 될까요? 중요한 정보는 더 강조처리를 해야할까요? 눈앞에 보이는 문제만 따라가다 보면, 개선은 금방 끝나지만 본질은 놓칠 수도 있어요. UI를 조금 고치는 수준에서 멈춰버리는 거죠.
그래서 이때 리서처가 문제 해결 구조를 잡아줘야 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라는 막연한 질문을 구체적인 단계로 바꿔주는 거죠.
① 유저가 이 기능을 통해 이뤄야 하는 것 먼저 정의하기
먼저 여태까지의 리서치 내용을 전부 펼쳐놓고, 사용자들이 ‘증시 캘린더’를 통해 진짜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다시 정리했어요.
캘린더는 단순히 ‘일정 확인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가 투자를 잘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구라는 게 명확해졌죠.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만드는 캘린더가 해결해야 하는 사용자의 ‘목표’가 선명해졌어요.
② 목표 달성을 막는 ‘방해요인’ 찾기
다음 단계는 현재 캘린더가 왜 목표 달성을 돕고 있지 못하는지 파악하는 일이었어요.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어요.

이 방해 요소들을 정리하고 나니, 우리가 만들어야 할 제품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그려졌어요.
“정보만 모아둔 공간이 아니라, 정보를 이해하고 대비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즉, ‘일정 나열 페이지’가 아니라 투자자가 시장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했던 거죠.
③ “잘 쓴다”의 기준을 먼저 합의하기
리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는데요. 바로 “이 서비스를 잘 쓴다는 건 무엇인가?”를 먼저 팀원들과 합의하는 거죠.
저희는 ‘증시 캘린더를 잘 쓴다’를 이렇게 정의했어요.
- 이번 주 어떤 이슈가 있는지 인지하고,
- 그 이슈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
- 거기에 맞춰 내 투자 계획을 준비할 수 있다.
그래서 UT를 진행할 때도 인지 → 이해 → 준비의 세 단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계속 점검했어요. 시안을 여러 번 수정하며, 의도가 잘 전달될 수 있는 화면을 계속 찾아 나갔죠.
이 과정을 거치고 나니, 우리의 디자인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가 만드는 건 단순히 일정을 나열하는 페이지가 아니라, 투자자가 시장을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제품이라는 점이 명확해졌죠.
이 경험을 통해 가장 크게 느낀 건, UX 리서처는 단순히 “더 나은 UX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이 제품은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왜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지 기준을 세워주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 기준은 언제나 사용자의 목표에서 시작해야 하고요.
3. 성장이 필요한 단계 - 제품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기
마지막으로, 성장이 멈췄을 때는 리서처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제품이 성숙기에 접어들어서 성장세가 완만해진 상황이 아니라, 초기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경우에 대한 이야기예요.
사례: 토스증권 PC
.png)
2024년, ‘토스증권 PC’ 제품이 출시됐어요. 기존 HTS(PC 주식 플랫폼)는 기능도 복잡하고 인터페이스도 난해해, 마치 전문가만 쓸 수 있는 요새 같았죠. 그래서 토스증권은 모바일 앱의 강점인 간결함과 직관성을 PC 환경에도 그대로 살려, 누구나 쉽게 거래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어요.
하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나오지 않았어요. PC로 거래하고 싶은 유저도 많고, 기능도 분명 충분한데 말이죠. 처음엔 문제를 UX나 기능에서 찾았어요. “찾기 어려운 버튼이 있나?”, “어떤 기능이 부족한가?” 같은 질문들이었죠. 하지만 곧 이 문제는 기능 차원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야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제품이 PC라는 환경에서 제공해야 하는 ‘새로운 가치’는 무엇일까?모바일을 큰 화면에 그대로 옮긴 건 아닐까?
토스증권에서 말하는 ‘심플함’은 사실 모바일이라는 맥락에서 정의된 가치였어요. 모바일은 언제든 빠르게 보고, 한 손으로도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었죠.
하지만 PC는 전혀 다른 세계예요. 책상 앞에 앉아 더 깊게 분석하고, 여러 창을 띄워 비교하고, 시간을 들여 판단하는 공간이죠. 모바일의 강점이 PC에서는 가볍다는 한계로 느껴질 수 있었던 거예요.
즉, 문제는 UX 세부 요소가 아니라 “이 제품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정체성이었어요. 그래서 기능 개선보다 먼저, PC라는 맥락 안에서 이 제품이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점검했어요.
사용자를 만났을 때 보게 된 현실
저희는 이 제품을 가장 잘 쓸 거라고 예상했던 ‘코어 타겟’을 만났어요. 토스증권 앱을 잘 쓰고, PC에서도 투자를 자주 하는 분들이었죠. 그런데 돌아온 얘기는 의외였어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PC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제품은, 사용자 눈에는 사실상 모바일의 복사본처럼 보였던 거예요.
그래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갔어요. 제품–유저–시장 관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한데 모아 펼쳐봤죠.
- 데이터: 유저는 어떤 화면에서 이탈하고, 어떤 기능을 거의 쓰지 않을까?
- 인터뷰와 설문: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 다른 제품: 다른 PC 주식 서비스는 어떤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을까?
- 시장 트렌드: PC 기반 거래 환경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팀과 함께 방향 찾기

이 모든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제품·디자인·전략·마케팅 등 유관팀과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지금까지 분석한 내용을 모두가 함께 보고, "지금 우리 제품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가장 가치 있을까?"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했죠. 그 중 우리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을 모아나갔어요.
이번 리서치는 특정 기능을 고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어요. 더 중요한 건 제품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팀 전체의 합의와 공감대를 만드는 일이었죠.
“남들도 저기 있으니까 우리도 따라가자”가 아니라, “우리의 강점을 고려했을 때 지금 가장 의미 있는 방향은 이곳이다”를 찾는 과정이었어요.
이 경험을 통해, 정체기 단계의 리서치는 단일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어요. 제품이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가장 가치 있을지, 그 본질적인 위치를 탐색하는 과정 이었죠.
결론
UX리서처로서 다시 생각해본 것
예전에는 UX 리서처란 리서치 자체를 잘하는 사람, 마치 '방망이를 깎는 장인'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스킬이 뛰어나고 날카로운 인사이트를 잘 발견해서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 최고의 리서처라고 믿었죠.
하지만 토스증권에서 일하며 제가 깨달은 것은 조금 달랐어요. 그런 방망이 깎는 일은 언젠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일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리서치 스킬 너머에 있다는 거였어요.
제품과 산업 전체를 조망하는 '넓은 시야', 그리고 흩어진 팀의 생각을 구조화하고 더 깊은 논의로 이끌어 결국 팀을 움직이게 만드는 'UX 리더십' 같은 것들이죠.
"그렇다면 지금의 당신은 그런 리서처인가?" 라고 물으시면, 솔직히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저는 토스증권에서 이런 리서처가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웠고,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매일 부딪히고 성장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오늘 제 이야기가, 여러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마주한 질문에 작은 힌트가 되었기를 바라요.
✅ 이번 아티클은 Toss Makers Conference 25의 세션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