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금융상품이 되기까지
안녕하세요, 토스뱅크에서 예적금을 만들고 있는 디자이너 장서영입니다.
은행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고 하면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아요. "은행은 제약이 많아서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만들기 어렵지 않아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서비스 중인 '키워봐요 31일적금'은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제품이에요. 디자이너들이 그린 시안 한 장이 어떻게 실제 금융상품이 됐는지, 그 과정을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아이디어의 시작
토스뱅크 디자인 챕터에는 OOTB (Out of the Box) 라는 시간이 있어요. 팀의 OKR과 관련이 없어도 괜찮아요. 더 좋은 경험을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끼리 자유롭게 고민하고,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에 예적금 디자이너들이 붙잡은 질문은 하나였어요.
어떻게 하면 사용자가 토스뱅크에 애착을 갖고, 자주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
자주 들어오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출석체크를 하면 리워드를 주는 거였을 거예요. 하지만 리워드 때문에 잠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은행을 스스로 찾아오는 경험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이미 있던 '키워봐요 적금'이었어요. 저금할 때마다 캐릭터가 자라는 적금이라, 애착을 만들기에 좋은 재료였죠.
가입한 사용자는 많았지만, 막상 들여다보니 사용자가 제품을 자주 찾지는 않았어요. 자동이체만 걸어두면 캐릭터가 알아서 자랐기 때문에, 가입한 뒤에는 앱을 열지 않아도 됐거든요. 한 번 끝까지 키운 뒤 다시 가입해도 매번 같은 모습이었고요.
좋은 재료가 있는데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제품을 다시 살려보기로 했어요.
여러 컨셉을 거쳐 답을 찾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사용자가 더 자주 들어오려면 게임처럼 재미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러 게임을 참고하면서 마을 주민 돕기, 고장 난 우주선 고치기처럼 기존 '키워봐요 적금'과는 다른 다양한 세계관을 다 같이 그려봤죠.

그런데 구체화할수록 한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이 게임을 하면서 왜 저금을 해야 하지?"
우주선을 고치는 이야기를 쓰려면 저금할 때마다 부품을 하나씩 받는 식으로 돈과 연결되는 규칙을 만들어야 했어요. 하지만 우주선을 고치는 일과 돈을 모으는 일 사이에는 원래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어색하게 느껴지는 스토리에는 늘 이런 억지스러운 연결이 필요했어요.
결국 저희는 다시 '키우기'로 돌아왔어요.

저금은 원래 조금씩 쌓아서 불려가는 일이에요. 캐릭터도 매일 조금씩 돌봐서 자라게 하는 거고요. 돈이 자라는 것과 캐릭터가 자라는 것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여러 방향으로 발산했던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어요. 여러 게임을 참고하고 직접 그려보면서, 사람들이 게임을 다시 찾게 만드는 장치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찾은 2개의 공통점을 '키우기'라는 컨셉에 하나씩 붙여봤어요.

- 매일 다른 스토리
RPG 게임의 일일 퀘스트처럼, 매일 들어오면 캐릭터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설계했어요. 오늘은 캐릭터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서 직접 앱을 열고 저금하게 되는 거예요.

- 다양한 엔딩
여러 번 플레이하는 게임에서 자주 쓰이는 멀티엔딩 시스템을 가져왔어요. 매일 캐릭터와 나누는 대화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능력치를 쌓느냐에 따라 마지막 날 여러 모습 중 하나로 진화하는 거예요. 한 번 엔딩을 본 뒤에도 아직 보지 못한 엔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시작할 이유가 생기죠.
처음부터 컨셉을 '키우기'로 정해놓고 개선 방향을 찾았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지 막막했을지도 몰라요.
여러 방향으로 넓게 펼쳐놓고 직접 그려봤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경험이 사람을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지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시안은 나왔는데, 금융상품이 될 수 있을까
디자인 초안을 만든 후에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어요. 게임은 재미 자체가 목적이지만, 이 제품은 결국 재미를 접목한 금융상품이에요. 매일 들어와 열심히 저금한 사용자에게 엔딩을 모으는 재미뿐 아니라, "와!" 할 만한 금전적인 보상도 주고 싶었죠.
하지만 막연히 많은 혜택을 줄 수는 없었어요.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사용자는 어느 정도의 혜택을 매력적으로 느끼는지부터 알아야 했거든요. 디자이너 혼자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어요.
그래서 예적금 상품을 가장 많이 만들어본 PO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같은 비용 안에서 어떤 보상 구조를 만들 수 있을지 함께 여러 가지 안을 그려봤어요.
같은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구조에 따라 사용자에게 보이는 혜택의 크기는 달랐어요. 이 중에서도 연 10%라는 금리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죠.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남았어요. 하루 5,000원은 적금치고 꽤 작은 금액이잖아요. 사용자가 이 금액을 의미 있게 느낄지 확신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사용자 테스트를 진행했어요. 실제로 이 적금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용자가 누구인지, 또 하루에 어느 정도 금액을 부담 없이 저금할 수 있는지 확인해봤어요.
예적금 경험이 적은 사용자들은 캐릭터를 키우면서 저금하는 방식에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하루 저금액에 대해서는 "아직 수입이 불안정해서 5,000원보다 많이 넣는 건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고요. 하루 5,000원이라는 금액이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렇게 매일 5,000원 저금하면 연 10%라는 보상 구조를 결정했어요.
"좋은데, 우리 팀이 왜 해야 하죠?"
토스뱅크 통장과 예적금을 관리하는 팀에 이 제품을 제안했어요. 돌아온 반응은 이랬죠.
"이걸 출시하면 저희가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좋은 경험이라는 것만으로는 팀을 설득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 제품이 팀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다시 살펴보기로 했어요.
해당 팀의 DA와 함께 토스뱅크 예적금 데이터를 살펴보니, 두 가지 특징이 보였어요.
여기서 실마리를 찾았어요. 통장만 쓰는 사용자가 첫 예적금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곧 팀의 기회였어요.
사용자 테스트에서 들었던 "아직 수입이 불안정해서 5,000원보다 많이 넣는 건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예적금을 시작하지 않은 사용자에게 필요한 건,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적금일지도 몰랐어요.
키워봐요 31일 적금은 이 부담을 덜어줄 수 있었어요. 기존에 토스뱅크에 있던 어떤 제품들보다도 적은 금액, 짧은 기간이었거든요. 실제로 예적금 경험이 적은 사용자일수록 이 방식에 더 긍정적이었고요.
이걸 팀의 관점에서 다시 보니, 이 제품은 예적금을 처음 시작하는 사용자가 부담 없이 적금을 경험해볼 수 있는 입문서였어요.

그렇게 키워봐요 31일 적금은 토스뱅크 예적금을 처음 경험하는 입문 상품으로 자리 잡았어요.
실제로 가입자의 절반은 한 달 중 3주 이상 저금하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31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저금하고 있어요. 한 번 끝까지 키운 사용자 중에는 다시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러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고요.
예적금 팀이 풀고 싶었던 문제와, 처음 디자이너들이 풀고 싶었던 문제를 하나의 제품으로 풀어낸 거예요.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기는 일
이 제품을 만들면서 동료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제품을 데뷔시키려고 애쓰는 소속사 대표 같아요."
돌아보면 정말 적절한 비유였던 것 같아요.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조율하고, 처음의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의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것까지 모두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려면, 좋은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것만큼 그 경험이 실제 제품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도 중요해요.
그 답을 디자이너 혼자 찾을 필요는 없어요. 비용 구조를 아는 PO에게 상품을 만들 방법을 묻고, 데이터를 읽는 DA와 함께 팀의 문제를 찾아볼 수도 있죠. 각자의 전문성을 가진 동료와 함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다 보면, 혼자서는 보이지 않던 방법이 보이기도 해요.
적용해보기
디자이너가 먼저 시작한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면, 이번 과정에서 제가 했던 질문들을 참고해보세요.
-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문제가 있나요?
지표가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방치된 제품이 있을 거예요. 사용자가 왜 다시 찾지 않는지, 어디에서 멈추는지부터 살펴보세요.
- 하나의 답을 정하기 전에 충분히 펼쳐봤나요?
버릴 아이디어까지 자유롭게 그려봐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가 선명해져요.
- 혼자 답하기 어려운 질문, 누구와 함께 풀까요?
비용이나 데이터처럼 디자이너 혼자 확신하기 어려운 영역은 PO, DA처럼 그 문제를 잘 아는 동료와 함께 선택지를 펼쳐보세요.
- 이 아이디어가 팀에는 어떤 의미인가요?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에서 멈추지 말고, 팀이 풀고 싶은 문제와 연결해보세요. 그 순간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에 한 걸음 가까워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