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를 위해 일부러 어렵게 만드는 경험, 어디까지 괜찮을까?

#토스#토스 디자인
오주연
2026년 9월 18일

안녕하세요. 토스뱅크에서 7세부터 17세까지, 미성년자를 위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 Product Designer 오주연이에요. 저는 10대가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돈을 빼내기 어렵게 하는 저금통 잠그기 기능을 만들었어요.

이 글에서는 ‘사용자를 돕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만드는 경험은 어디까지 괜찮을까?’를 고민했던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목표금액까지 못 채우면 못 꺼내게 해주세요"

10대를 위한 제품을 만들며 여러 리서치를 했는데, 아이들의 용돈 생활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패턴이 있었어요. 돈을 모으고 싶어 하지만 쓰고 늘 후회하는 경험을 반복하는 거였죠.

저축을 결심해도 눈앞의 사고 싶은 것을 참기 어려웠고, 결국 열심히 모으던 돈을 써버리는 것이었어요. 이런 실패가 쌓이면서 ‘나는 돈을 잘 관리할 수 있다’는 감각도 낮아지고 있었고요.

발달심리학에서는 이를 이중 시스템 모델로 설명하기도 해요. 무언가를 갖고 싶게 만드는 보상·감정 시스템은 사춘기 무렵 빠르게 발달하지만, 충동을 조절하는 전두엽은 20대 초중반까지 발달이 이어져요. 10대는 저축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크지만, 당장의 유혹을 참는 힘은 아직 자라는 중인 셈이죠. 그러니 저축에 실패한 건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어요.

어느 날은 이런 피드백들이 올라왔어요.

“목표금액까지 못 채우면 돈 못 꺼내는 저금통 만들어주세요ㅜㅜ 저를 못 믿겠어요.”

아이들은 이미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어요. 저축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한 번 더 자신을 말려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죠.

이 목소리에서 잠금 저금통이 출발했어요.

잠금을 어떻게 풀 것인가

그런데 목표금액을 채우지 않아도 결국에는 자신의 돈이기 때문에 원하면 돈을 꺼낼 수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얼마나 쉽게, 혹은 얼마나 어렵게 풀리게 해야 할까요? 이 난이도가 잠금 저금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팀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아이디어를 모았고, 어느새 스레드에는 70개가 넘는 의견이 쌓였어요. 주사위를 굴려서 6이 나와야 열리는 것, 계좌번호를 외워서 입력해야 하는 것, 친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열리는 것…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정말 많았어요.

그중 유독 반응이 좋았던 아이디어가 ‘돼지저금통 부수기’였어요. 화면 속 저금통을 두드리면 쨍그랑 깨지면서 모은 돈이 쏟아지는 거예요.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어릴 때 게임에서 무언가를 신나게 부숴본 기억도 있잖아요. 팀 반응도 좋았고, 저도 처음에는 ‘이거다’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디자인을 시작하니 마음 한구석이 계속 걸렸어요. 어릴 때 용돈을 모으던 돼지저금통을 깼던 날이 떠올랐거든요.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깼는데, 동전을 하나씩 세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어요.

사고 싶은 걸 사는 건데, 왜 혼나는 기분이 들지?

돌이켜보니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저축에 실패했을 때 이야기했던 감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돈을 쓴 것 자체보다 ‘또 참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남는다는 이야기가 반복됐어요.

30대인 제 눈에는 돼지저금통을 부수는 게 재미있는 인터랙션이지만, 그걸 경험하는 10대에게는 ‘저축에 실패했다’는 낙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을 꺼내는 건 잘못이 아닌데, ‘부순다’는 연출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을 남길 수 있으니까요. 만드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경험이, 쓰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어요.


재미보다 기준을 먼저 세우다

결국 저금통을 부수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잠금을 푸는 경험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부터 다시 정의했어요.

하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동할 것

인지능력, 문해력, 손재주, 반응 속도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면 안 돼요. 계좌번호를 외워 입력하는 방식은 17살에게는 재미있는 미션일 수 있지만, 어린 사용자에게는 훨씬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어요. 잠금은 저축을 돕기 위한 장치인데,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돈을 꺼낼 수 있는 정도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둘.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 것.

미래의 목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건 괜찮지만, 지금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방식은 피하기로 했어요. 저축을 지키게 만들겠다고 죄책감을 도구로 쓰는 순간, 그건 응원이 아니라 벌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돈을 꺼내는 순간을 실패처럼 보여주는 연출은 제외했어요. 돈을 꺼내면 저금통이 눈물을 흘린다던가, “목표를 지키지 못했어요” 말을 따라 쓰게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요.

셋. 아이의 돈은 아이의 것일 것.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자기 돈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가 있어야 했어요. 친구의 허락을 받아야 열리는 방식은 재미있는 소셜 요소처럼 보이지만, 내 돈을 꺼내는 데 다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하다면 돈에 대한 주도권을 아이가 갖기 어려워져요.


잠금이 응원이 되도록

가장 신경 쓴 건 ‘온도’였어요. 잠금은 자칫 ‘막힌 문’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돈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장치니까요. 하지만 이 잠금은 아이가 스스로 원해서 건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아이를 가두는 장치가 아니라, 아이가 세운 결심을 지켜주는 장치여야 했어요.

그래서 해제 방식으로는 버튼을 몇 초간 지그시 누르고 있어야 잠금이 풀리는 방식을 택했어요. 돈을 꺼내기 전까지 잠깐의 ‘틈’을 만들어주니까요. 충동적으로 손이 가더라도, 버튼을 누르고 있는 그 몇 초가 ‘정말 지금 꺼낼까?’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요. 이 과정을 통해 10대들이 충동을 인내하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잠금이 강제나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UI와 인터랙션의 무게감을 조절했어요. 예를 들어 잠글 때 ‘철컹’ 하고 강하게 잠기는 느낌은 피하고 싶었어요. 비주얼 디자이너와 함께 부드러운 톤과 그라데이션을 사용해, 잠그는 순간조차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했죠. 잠글 때도, 풀 때도 아이가 혼나는 기분보다 응원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요.

가장 오래 고민한 건 기술이나 화면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실패감 대신 성장의 경험을 갖게 할까?’를 가장 많이 고민했죠.

그래서 출시 후 들어온 이런 목소리가 유독 반가웠어요.

은행은 보통 계좌, 이자, 잔액처럼 돈을 관리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잠금 저금통을 만들면서, 은행이 사용자의 금융 경험을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제 막 돈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특히 더 그렇고요.

적용해보기

이 경험은 꼭 10대들의 저금통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집중 모드, 앱 잠금, 사용 시간 제한처럼 사용자를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어렵게 만드는 제품은 많아요. 그럴 때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요.

  • 나이와 이해도, 상황이 다른 사용자에게도 공평한 난이도일까?
  • 이 설계가 사용자에게 죄책감이나 실패감을 남기지는 않을까?
  • 만드는 나에게 재미있는 것과, 쓰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을까?
  • 사용자를 돕기 위해 만든 장치가 오히려 사용자의 선택권을 빼앗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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