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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 피플: 50살, 엔지니어로 살아남는 법

고동일(Diko Ko)
2025년 8월 28일

오늘은 Toss USA에서 Director of Engineering으로 근무하고 계신 고동일(Diko Ko)님의 커리어 이야기를 들려드려요. Diko님은 한국 IT 업계가 막 시작되던 90년대에 게임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미국의 글로벌 회사와 창업 등 정말 다양한 경험을 거쳐 오셨는데요. 지금은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Toss USA에서 토스의 광고 기술을 고도화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Q. Diko님은 스스로를 세 가지 정체성으로 정의한다고 들었어요.

저는 제 인생을 세 가지 페르소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Anime Otaku, 또 하나는 Game Developer, 그리고 지금의 Engineer/Producer예요. 제 자아는 이 세 가지 축이 겹치며 만들어진 것 같아요.

Q. 순서대로 얘기해보고 싶어요. 애니메이션에는 어떻게 빠져들게 되셨나요?

중학생 때 변덕쟁이 오렌지로드(きまぐれオレンジ☆ロード)라는 애니를 보게 된 게 계기였어요. 문제는 그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건 불법으로 취급됐다는 거죠. 보고 싶으면 회현역 지하상가에 VHS 테이프를 들고 가서 불법 복사를 해야 했어요. 정말 마약 거래 같은 느낌이었죠.

주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보고싶은 것을 보려면, 1등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단순한 동기 덕분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어요.

당시는 90년대 초였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압박이 있었던 시기였지만 굴하지 않았어요. 직접 번역하고 자막을 달아 상영회를 열었고, 결국에는 선배들의 인정을 받게 됐죠. 그렇게 만든 동아리가 애니뮤인데, 지금도 서울대학교 공대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Q. 애니메이션이 자연스럽게 게임 개발로 이어졌군요?

맞아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당연히 게임도 좋아했죠. 컴퓨터공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대학원 석사 과정 중이었던 1997년,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던 김택진 대표님이 막 엔씨소프트라는 회사를 창업했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셨어요. 밤에는 일을 하고, 아침에는 연구실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이어갔어요.

당시 전체 인원이 20명도 되지 않던 엔씨소프트에서, 게임 개발을 하고싶었던 차에 리니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당시 리니지팀은 3명이었고, Sun Solaris 서버에 언어는 Objective C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동시 접속자는 겨우 300명 정도였는데요, ‘말하는 섬’만 존재했답니다. 밤에는 GM을 하고, 동시에 유저 캐시 서버도 만들었어요.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Redis 같은 기술이 없던 시절이라, 서버가 죽으면 유저 데이터가 통째로 날아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백업으로 갖고 있으면서, DB IO를 줄여주는 서버를 따로 만들었어요.

리니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 경험이 이후 제 커리어에 정말 큰 자산이 되었고 게임 업계에서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Q. 한국 IT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를 직접 겪으셨네요! 게임 개발자로서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어떤 건가요?

게임 개발자로서의 커리어 정점은 단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요구르팅을 만들던 시절이에요. 요구르팅은 서브컬처풍 MMORPG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죠. 최초로 인스턴스 던전 기반의 플레이를 갖고 있었고요.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저에게는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예요. 아직도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태국의 유저들이 가끔 연락을 줘요. 제 능력과 자아가 가장 잘 맞아 떨어졌던 시기라고 생각해요.

Q. 그 이후로는 글로벌 회사에서의 경험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2006년에는 Realtime Worlds Asia라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GTA를 만든 데이빗 존스가 세운 영국 회사의 합작 법인이었어요. 이때 미국 VC와 투자 유치를 같이 다니면서, 실리콘 밸리식 스타트업 문화를 가까이서 배울 수 있었죠.

이후 20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Cyworld USA에서 Sr. Director로 일했어요. ActiveX 기반이었던 기존의 미니홈피를 Web 기반으로 변경하는 작업과 함께, Flash 상에서 3D를 구현해 일종의 소셜 게임 플랫폼을 만드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쯤, 금융 위기가 터졌어요. 사무실이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의 Market St.에 금융 회사들이 많았는데요, 갑작스러운 Layoff로 박스를 손에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답니다. 이 떄문에 미국 Cyworld는 사업 철수를 결정했어요.

Q. 전세계가 어려웠던 때군요. 하지만 경제 위기에 굴하지 않고 창업 경험도 있으시다고요.

한국에 돌아와 Altwave Lab이라는 회사를 창업했어요. 외주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아이패드 용 판도라TV 앱을 혼자서 만들기도 했죠. 그러다 모바일 게임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다시 게임업계로 돌아와, ‘시드 이야기’라는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 서비스 했어요. 이후 다른 공동창업자들과 추가 투자를 유치해 Singta라는 게임사를 세웠습니다. 요구르팅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일본의 커넥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제작도 진행했고, 당시 일본에 진출하던 한국 모바일 게임들의 일본 성우 녹음에 디렉터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어느날, 회사의 재정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무리한 프로젝트와 추가 투자 유치 실패로 결국 회사가 버티지 못한거죠.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자아와 현실의 불일치가 가장 심했던 때예요. 결국 번아웃이 왔고, 건강 악화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Q. 다시 엔지니어로 돌아오신 건 Moloco에서였군요.

맞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게 뭘까?”를 곰곰이 생각했어요. 답은 단순했어요. 다시 엔지니어링 자체로 돌아가고 싶다. 무언가를 직접 만들때 가장 즐거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운 좋게 Moloco에 신입 엔지니어로 입사할 수 있었어요. 그 때 Moloco는 20명 남짓하던 회사였는데 덕분에 필요한 것은 모두 직접 만들 수 있는 환경이었죠. 처음에는 할 사람이 없어서 Web Frontend 개발을 하다가, 이후 API, 광고 서버 개발까지 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Cloud 기반환경과 온라인 광고기술을 경험하며 Staff Software Engineer까지 성장할 수 있었죠. 더불어 기존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회사의 급격한 성장까지 경험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Q. 토스에는 어떤 이유로 합류하게 되셨나요?

Moloco는 DSP(Demand-side Platform) 영역에서는 최고의 회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DSP 특성상 광고주의 입장에서 광고를 바라보게 되고, 실제로 유저가 어떻게 보고 대하는가를 알기에는 제약이 있어요. 반면 토스는 퍼블리셔이자 광고주를 동시에 품고 있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죠.

저는 광고주와 퍼블리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모델을 직접 경험하고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토스를 선택했습니다. 함께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토스의 실행력과 속도에 감탄하고 있어요.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Toss USA 사무실 - Diko님의 자리

Q. 마지막으로, 50살에도 엔지니어로 살아남는 비결이 있다면요?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열망(Aspiration), 겸손(Humility), 회복력(Resilience).

세상은 수많은 우연과 상호작용으로 흘러가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게 결국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Interviewee 고동일(Diko Ko) Interview 신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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