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금할 때 은행 이름을 꼭 입력해야 할까요?
송금은 토스의 최초 서비스이자 토스의 성장을 견인한 대표 기능이에요. 지난 6년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100번 이상의 개선을 거쳤어요. 그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송금 플로우가 만들어진 상태였죠. 제가 송금 제품을 맡았을 때 그 점이 가장 부담이었어요.
이미 고도화된 제품에 디자이너는 어떻게 가치를 더할 수 있을까요?
문제
대한민국의 누구든 돈을 송금하려면 ‘은행’을 먼저 선택해야 했어요. 어떤 송금 서비스든 예외 없이 이건 다 똑같았죠. 이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용자 인터뷰를 하다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어요. 사용자가 송금하다가 ‘계좌’ 페이지에서 은행을 누르지 못하고 오래 머물고 있었죠.
알고 보니 송금할 은행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심지어 제일 앞의 NH농협을 못 보고 지나쳐 아래로 스크롤 하다 다시 맨 위로 돌아왔어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은행 선택 과정에서 머뭇거리는 사용자의 모습을 여럿 발견했어요. 한두 명이 겪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그간 고객센터로 들어온 문의를 다 살펴봤어요.
하지만 은행을 찾기 어렵다는 피드백은 하나도 없었죠. 그럼 이 현상은 무시해야 할까요? 하지만 주변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헷갈린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문제는 분명히 존재했죠.
10 to 100 제품, 그러니까 성숙기 제품의 문제는 비언어적이에요.
표면적인 니즈는 대부분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만 남은 거죠. 사용자 자신도 모르게 불편함을 견디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디자이너의 역할은 그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 같나요? 저는 은행 목록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해결
많은 목록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 은행 목록을 한 줄, 혹은 두 줄로 보여주기
- 가나다순, 혹은 최신순으로 보여주기
- 정렬 옵션 넣기
- 검색 기능 넣기
- 그 외 다양한 아이디어
그런데 각 솔루션의 단점이 너무 명확했어요. 지금보다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았죠. 그나마 검색이 가능성이 있어 보였어요. 심지어 UT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검색 기능을 넣어달라고 요청한 사용자도 있었거든요.
검색창이 있다면 은행명도 검색할 수 있고, 계좌번호도 검색할 수 있고, 연락처와 사람 이름까지 다 검색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UT 후 완전히 잘못된 UX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사용자 대부분이 무엇을 입력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거든요. 그리고 깨달았죠. 만능은 무능과 똑같다는 사실을요. 스테이크를 주문한 사람에게 스테이크 전용 나이프가 아닌 기능만 많은 맥가이버칼을 준 격이었어요. 통합 검색은 입력과 결과의 형태가 예측 가능해야 작동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질문부터 바꿨어요. ’어떻게 은행을 빨리 찾게 해줄까?‘가 아니라,
어떻게 은행 찾기를 없애버릴 수 있을까?
이 질문 덕분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은행을 찾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은행을 추천해주자. → 은행을 추천하려면 추론이 가능한 정보가 있어야 하니까 계좌번호를 먼저 받자!
유레카!
그런데 잠깐. 너무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나 송금할 때 은행 이름 먼저 말하고 계좌번호를 말하잖아요. 숫자 먼저 말하는 사람은 없죠. 사용자의 행동을 억지로 바꾸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만약 미래를 알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은 다 의미가 없겠죠. 그래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UT를 했어요. 사용자는 프로토타입을 보여주었을 때야 비로소 불편함을 말했어요. “(지금 앱은) 계좌 탭 들어가서 은행 선택하고 계좌번호 누르고 해야 되서 불편해요.“
답이 나올 때까지 3차에 걸쳐 UT를 했어요. 마지막 UT에선 사용자가 너무 자연스럽게 송금하는데다가 뭐가 바뀐 지도 몰랐어요. 생각할 필요도 없는 UX였던 거죠.
의도를 담은 질문은 인터뷰에서 권장되지 않는 방법이지만,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직설적으로 물어봤어요.
“계좌번호 먼저 치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안 불편한데요?”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상식이 아니었어요. 사용자가 은행부터 입력하고 있었던 이유는 단지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죠. 모든 사용자가 똑같이 하고 있다고 그것이 정답은 아니에요.
프로토타입으로 UX를 검증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실제로 은행이 잘 추천되게 하는 것이었어요. 이것을 가장 잘할 수 있는 팀은 머신러닝팀이었죠.
원래 시안에선 하나의 은행만 추천해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정확한 은행을 추론할 확률이 95%밖에 안 되었어요. 그래서 세 가지 은행을 추천해주는 아이디어로 선회했고 덕분에 정확도를 99% 이상으로 올릴 수 있게 되었어요. 게다가 최종 선택권을 사용자에게 줌으로써 사용자의 권리도 존중할 수 있었죠.
결과
원래 사용자에게 은행 선택은 인지적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계좌 번호를 먼저 입력하게 바꿈으로써 사용자는 62개의 은행과 증권사를 알 필요가 없게 되었죠.
이 기능은 2022년 6월에 배포되었어요. 배포 후 1.5년이 지난 지금, 다른 핀테크 회사 및 은행들도 점차 같은 방식으로 변경하고 있어요. 토스 사용자가 아니어도 어디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된 거죠.
우리가 아는 상식이란 의외로 처음엔 비상식적이에요. 관습의 틀을 깨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내 새로운 기준이 되고 상식이 돼요. 디자이너는 이렇게 세상에 가치를 더해 새로운 상식을 만들 수 있어요.
적용해보기
성숙기 제품의 개선 과정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어요.
개선하지 말고 제거한다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제거하려고 했기에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어요. 문제를 제거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범용적 제품을 만들 수 있어요.
패턴은 비효율이다 발견한 문제에 패턴이 보이나요? 만약 규칙성이 있다면 규칙 기반으로 자동화가 가능하고, 규칙이 느슨하거나 너무 복잡하다면 AI로 비효율을 해결할 수 있어요.
익숙함은 부채(debt)다 익숙해지면 신선한 시각을 잃게 돼요. 불편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지 탐정의 시선으로 내 제품을 사용해보세요.